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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은 후

그렇군요 / 프랭크 매코트

 

그렇군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솔직하게 쓸 수 있는 힘. 마음의 크기에 감동한다.

아일랜드 이민자. 가난했던 시절. 가감없는 이야기.

본인 스스로도 이런 이야기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 생각하게 만들었던 독서를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과정들이 흥미롭다.

 

 


영국에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세기 중반의 아일랜드. 돈이 생기는 족족 술집에 갖다 바치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대신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 그런 부모 밑에서 생계를 위해 우편배달에 신문배달, 협박편지 대필까지 했던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훗날 자라서 궁핍했던 이 시절의 경험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생생하게 그려내 전세계 독자들을 울리고 웃기며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바로 프랭크 매코트와 그가 예순여섯 살에 발표한 첫 작품 『안젤라의 재』의 이야기다. 아일랜드인 특유의 유머와 가슴 찡한 정서를 담아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이 작품은 퓰리처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LA 타임스 도서상 등을 비롯해 비소설문학으로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문학상을 휩쓸었고, 미국에서만 4백만 부 이상이 팔려나가고 27개국에 17개 언어로 번역되는 등 회고록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안젤라의 재』에서 소년 프랭키는 근근이 돈을 모아 열아홉 살이 되는 해 미국행 배에 몸을 싣고, 그의 유년과 함께 이야기도 끝이 난다. 프랭키의 목소리에 매료된 평단과 독자들은 하나같이 그후 그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해했고, 이 기대에 부응하듯 작가는 꼭 2년 뒤 ‘이 청년에게, 그러니까 나에게 그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는 말과 함께 전작의 마지막 문장 “그렇군요”를 제목으로 붙여 후속작을 발표했고, 이 작품은 정확히 전작이 끝나는 지점, 즉 1949년의 뉴욕에서 시작된다. 전작이 현재시제와 과거시제를 오가는 문장을 통해 순수한 어린 소년의 눈으로 1930년대 아일랜드 빈민가에서의 삶을 시적이고 아름답게 그려냈듯, 이번 작품 역시 현재시제를 적극 사용함으로써 청년 프랭키의 눈으로 바라본 뉴욕을, 젊은 이민자의 고독과 좌절, 어색함, 무력감, 자유에서 오는 혼돈, 떠나온 나라에 대한 양가감정을 생생히 묘사해냈다. 물론 많은 독자들을 매료했던 유머러스한 입담 역시 고스란히 살아 있다.
청년으로, 남자로 성장한 프랭키는 이번 작품에서 우여곡절 끝에 꿈에 그리던 교사가 된다. 뉴욕 공립학교의 보통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삶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열혈 선생’ 프랭키의 인생 후반부 이야기는 그의 세번째이자 마지막 회고록 『선생 노릇』(문학동네 근간)을 통해 더 상세히 펼쳐질 예정이다.

모두가 행복한 꿈의 도시 뉴욕
내게 허락된 것은 허기와 열등감, 사소한 농담들이 전부였다


1949년 10월, 열아홉 살이 된 프랭키는 아일랜드에서의 가난한 삶을 뒤로하고 미국 땅을 밟는다. 하지만 부푼 꿈을 안고 찾은 그곳도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은 아니었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무일푼의 이민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호텔 청소부나 항만 하역뿐. 가뜩이나 적은 임금에 아일랜드의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생활비를 부치고 나면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얼마 되지 않고,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읽는 시간과 매일 밤 마시는 한 잔 술이 작은 위안이 되어줄 뿐이다. 그러던 중 한국전이 발발하자 프랭키도 군인으로 징병되어 2년간 독일로 파견되고, 그후 뉴욕으로 돌아와 제대 군인 자격증을 들고 뉴욕대학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본 입학처장 덕분에 그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사범대에 입학한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도 쉴 틈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그에게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먹고사는 걱정 없이 ‘실존주의’를 논하는 다른 학생들과는 섞이지 못한 채 열등감을 느낄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동안 꿈꿔왔던 고등학교 교사가 되지만, 생활은 여전히 쪼들리고 전형적인 미국인 중산층 가정에서 곱게만 자라온 약혼녀 앨버타와의 관계는 삐걱댄다.
케네디와 킹 목사의 암살, 베트남전 발발과 학생 시위 등 격동의 1960년대를 거치며 청년 프랭크도 미국에 자리를 잡고 장년기에 접어든다. 그사이 앨버타의 마음을 돌려 결혼에 성공해 딸아이도 낳고, 남동생들에 이어 어머니 안젤라까지 뉴욕으로 데려와 온 가족이 십 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학생들 앞에서 쩔쩔매던 초보 교사 티를 벗고 학교생활도 순조로우니, 이제는 평온한 삶이 펼쳐지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폭음을 하는 버릇은 아일랜드의 유전자 깊숙이 박혀 있는 듯 고쳐지지 않고,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내와의 간극이 메워지지 않아 결국 딸 매기가 열 살이 되던 해 이혼을 한다. 게다가 미국에서 돈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어머니는 초라한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며 미국의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가끔씩 만나는 프랭크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만 내뱉는다.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는 결국 1985년 8월 생을 마감해 한 줌의 재가 되고, 프랭크는 동생들과 함께 그녀의 유해를 뿌리러 아일랜드로 떠난다.

떨쳐버리고 싶은 지난날,
그 시절의 기억까지 넉넉히 감싸안는 생에 대한 커다란 긍정


이 책의 원제 ’Tis는 ‘It is’에 해당하는 아일랜드 방언으로, 프랭크 매코트의 삶과 작품의 정서에 비추어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프랭크 매코트는 ‘나나 내 동생은 우리의 출신을 떠올릴 때면 부끄러운 기분과 함께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라고 밝혔다. 신발 한 켤레 사 신을 돈이 없어 맨발로 돌아다니고 장작이 없어 집 안 벽에 붙은 나무판자를 뜯어내 불을 피워야 했던 아일랜드에서의 유년 시절은 그에게 그저 떨쳐버리고 싶은 끔찍한 기억이었던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삶을 꿈꾸고 건너간 미국에서도 아일랜드의 흔적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그때만 해도 미국에는 1920년대 이후 대규모로 이민을 와서 일자리를 위협하던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반감이 남아 있었고, 어느 상점이나 ‘아일랜드인 지원 사절’ 간판을 내걸었다. 프랭크 역시 입만 열면 나오는 아일랜드 사투리 탓에 사람들에게 무시당했고, 미국 억양을 흉내 내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멋진 구릿빛 피부와 하얀 이’를 자랑하며 웃고 떠드는 평범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그는 그저 촌티 나는 무식한 이민자일 뿐이었던 것이다. 아일랜드계라는 꼬리표는 밑바닥 인생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아일랜드의 방언을, 다른 단어도 아닌 ‘그렇군요’라는 포용의 말을 작품의 제목으로 썼다는 점에서 결국은 그 시절의 비참한 기억까지 넉넉하게 감싸안는 생에 대한 커다란 긍정이 묻어난다. 소년은 자라 청년이 되었고, 비참한 세상을 마냥 천진하고 아름답게만 바라볼 수 있는 시기는 이제 지나갔다. 하지만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전작의 유려한 입담은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프랭크 매코트는 희로애락이 뒤섞인 젊은 이방인의 삶을 지나치게 고통스럽거나 위대한 것으로 포장하지 않고 그저 소박한 목소리로 차분히 그려낸다. 신산한 인생을 살아왔던 어머니 안젤라의 죽음 앞에서 차마 울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러면서도 생전에 그녀가 좋아했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프랭크의 모습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 장면들 속에서 프랭크 매코트는 우리의 진짜 삶에는 소설과도 같은 완전한 해피엔딩도, 완전한 새드엔딩도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그저 이렇게 조금은 달고 조금은 쓴맛으로 조용히 흐르는 것이 삶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결코 순탄치 않은 시간을 보내왔음에도 때로는 유쾌한 목소리로, 때로는 가슴 찡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을 들려주는 『그렇군요』는 읽는 이의 마음에 오래도록 가시지 않을 진한 여운을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