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읽은 후

토요일 / 이언 매큐언

 

토요일

 

 

 

 

예를 들어? 그러니까, 예를 들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도시에서, 어떤 세기에, 과도기에, 대중의 한 사람으로, 과학에 의해 변형되어, 조직화된 권력하에서, 가공할 규모의 통제를 당하며, 기계화가 빚어낸 조건 속에서, 혁명의 희망이 실패로 돌아간 뒤, 공동체가 결코 아니며 개인의 가치를 폄하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자아를 하찮은 것으로 만든 다수의 복합 권력에 기대어, 외국의 적과 싸우는 데는 수십억 달러의 군사비를 지출하면서 국내의 치안에는 인색한 권력, 자신들의 위대한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야만과 포학 행위를 묵인하는 권력 말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공동의 노력과 의지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깨달은 수백만 시민이 압력을 행사한다. 수백만 톤의 물이 해저에서 생명체를 빚어내듯이, 조수가 돌멩이의 모를 깎아 빛을 내듯이, 바람이 벼랑에 구멍을 뚫듯이, 눈부신 최첨단 기계들이 무수한 사람들에게 새 삶의 장을 열어주는 이 시대에, 그들의 생존권을 부정할 것인가? 그들더러는 노동하고 굶으라고 하면서 당신은 느긋하게 구시대의 가치를 즐기겠다는 건가? 당신, 당신은 이 대중의 자식이며 나머지 모든 것의 형제다. 그렇지 않다면 배은망덕한 호사가에 얼간이다. 거기, 허조그, 예를 들어보라니, 그래 허조그가 생각난다. 거기가 이 세계가 돌아가는 표본이겠다.

솔 벨로 『허조그』1964

 

 

 

마지막 장을 덮고 맨 앞 시작 전 쓰여있는 이 글을 다시 읽으니 비로소 그 뜻을 알겠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신경정신과 의사 헨리 퍼론. 그의 아들은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정치란, 지구온난화, 국제 기아, 이런 큰 주제에 매달리다보면 전부가 정말로 끔찍하고 아무것도 좋아지는 게 없는 것 같고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는 것 같잖아요. 하지만 작은 거, 가까운 걸 생각하면, 새로 만난 여자애라든가 체스하고 함께하게 될 노래라든가 다음달 놀러 갈 스노보드 여행, 이런 거 말이죠, 그러면 세상도 근사해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제 모토예요. 작게 생각하라."

이 책 전반을 흐르는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 공권력이 집중된 상태에서,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차단된 도로, 미심적은 자동차 접촉 사고와 불량배의 폭력성 앞에 노출되는 와중에 우두머리 벡스터라는 사내의 유전질환인 퇴행성 신경질환의 특성을 알아보게 되고, 그 특징을 이용한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하게 되지만 벡스터의 자존심을 다치게 한 그 일로 인해 그들은 가족이 모인 평화로운 집안에 침입하고 가족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지만, 헨리는 도로에서 폭력을 마주한 순간에도 벡스터의 눈빛을 바라보며 했던 아래의 생각때문에 사건 이후 계속 개운하게 그 일을 털어내 버릴 수가 없었다.

<혼란인지, 감정이 변하는 이 중간 단계에서 어딘지 원숭이 같은 그의 얼굴 생김이 부드럽게 누그러지는데,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병을 논외로 치자면, 그는 머리가 좋은 젊은이로,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고, 뭔가 큰 실수를 저질렀으며, 어쩌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아마도 오래전에 학교를 그만뒀으며, 그것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부모는 곁에 없었다.>

집안에 침입자가 있고, 칼에 의해 굴종당하는 상황은 생각만으로도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껴지는데 그 상황을 너무도 치밀하게 잘 자라준 자식들과 장인어른, 아내와 자신의 내면과 벡스터의 모습을 그려내서 분노와 안쓰러움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도록 장치한 것은 이 사회가 내 자식만을 잘 키우는 것으로는 자식의 행복을 담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연장선에서 이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무언가 행동하고 기여해야 한다는 가치를 말하고 싶어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요양원에 가신 어머니가 평생 살아오신 집을 정리하며 그가 느끼는 소회는 죽을 땐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물건은 주인과 지난날로부터 격리되는 순간 곧바로 쓰레기가 된다는 말로서 인간의 무위와 한계를 느끼게 한다.

생각했다. 죽음을 앞둔 부모와 성장하여 부모의 곁을 떠나 스스로 서는 자식들. 한 주를 열심히 살아내고 휴일을 앞두고 있는 이런 마음이 되면 이 모든 것을 관조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하겠구나. 내 아이만을 바라보는 교육, 내 아이만 잘되게 키우는 삶이 아니라 그것에서 한 걸음 더 지평을 넓혀 내 아이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야 할 아이들까지 함께 바라보는 사회적 시스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주관적이게도 헨리 퍼론의 이야기를 공감하기 시작한 건 초반부 재즈 기타리스트인 아들에 대한 마음을 드러낼 때였다.

<조바꿈을 알리는 잔잔한 스타카토, 와락 끊어 때리는 반음 올린 3화음, 화음의 흐름을 깨뜨리는 한 음, 절묘하게 들어간 반내림 5음, 감각적으로 꺾어 내는4분음박 7음. 그러다 짤막하게 휘감기는 혼이 담긴 불협화음. 이 아이는 예상을 뒤집는 박자감을 타고났다. 그러니까, 셋잇단음을 둘잇단음 혹은 넷잇단음으로 바꿔 연주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연주가 빨라지면 비밥의 악센트가 나온다. 그것은 최면, 손쉬운 유혹이다. 헨리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심지어 로절린드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웨스트엔드의 어느 술집 뒷자리에 앉아 연주를 듣다보면 전율이 일어나고, 아들이 자랑스러워―음악이 주는 감동도 한몫하겠지만―가슴이 벅차오르며 때로는 통증까지 느껴진다는 사실을. 그럴 때면 쉼쉬기가 힘들다. 블루스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우울이 아니라, 낯선 그러나 세속적인 환희다.>

그리고 시인으로 등단한 딸이 권해주는 책을 이해와 상관없이 읽으려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느낄 때였다.

그렇기에 더 힘이 실리는 그의 형제애와 용서에 감동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