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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뜰

지현이에게 2010.11.4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씻자는 엄마 말에 그리던 그림을 마저 그리겠다는 의사 표현을 하는 너.

학교에 가는 날이야. 빨리 학교 다녀와서 그리던 거 마저 그리자.

엄마의 말에 겨우 어쩔 수 없다는 몸짓으로 일어나는 너.

언제쯤 학교에 가는 일이 당연한 일이 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다가도 지난 시간들을 생각하면 이만큼도 감사하지 하곤 곧바로 마음을 추스르게 되네.

 

유치원, 초등학교부터 학교라면 무조건 안 가려는 너를 등교시키기 위해 세수부터 옷 입기까지 몽땅 엄마 손으로 해서 거의 끌고 가다시피 교실에 들여놓고 울면서 돌아오는 날이 허다했었고

마음을 열지 않고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교실 책상에서 꼼짝도 못 하고 긴장하고 앉아만 있다가 오는 너를

아프게 바라보던 날들을 지나 그나마 학교에 마음을 주고 친구들과 함께 활동하던 고학년이 된 후 몇 개월은 왜 그리도 빨리 지나갔었을까.

 

초등학교에 적응할만하니 중학교에 가야 했는데 중학교에 보내기까지 그 시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많은 선생님들과 상의하고, 그러고도 모르겠어서 엄마가 복지관에 자원봉사를 다녔었어.

일반 고등학교, 특수학교를 졸업한 언니, 오빠들이 모여 있는 작업장에 가서 내 자식을 보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더니 일반학교를 다닌 언니들은 말은 너무 잘하고 활달한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도 적었고, 특수학교를 마치고 온 언니들은 표정은 좀 담담해 보여도 소리 없이 자기가 맡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단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마음이 기운 장면은 희아라는 피아니스트의 다큐를 보고 나서였어.

공연을 마치고 오랜만에 학교에 갔는데 같은 반 친구들이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친구들과 정말 동등한 친구관계라는 느낌을 가지는 순간

지현이 너도 저런 친구관계를 만들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과 바꿔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었지.

 

학교에 시간 맞춰 보내는 것에 급급했던 엄마는 너에게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지 못했었고,

중학교에 가서도 선생님의 배려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또 의존적인 학교생활을 하게 한다는 것이 너에게 좋은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에 많은 고민 끝 특수학교를 선택했는데, 친구들의 와글와글하고 웃는 소리들을 좋아하는 너를 소리가 없어진 곳에 보낸다는 것에는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었구나.

 

중학교에 가면서부터 말이 없어진 너. 표정이 없어진 너. 학교에 가서 그런 네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러는 중에도 한 가지 위안은 초등학교 6년 내내 학교에 보내기 위해 씨름하던 아침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이야. 아침을 먹고 그리던 그림을 마저 그리겠다는 표현을 꼭 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학교에 안 간다고는 않는 게 이 녀석이 그래도 학교가 싫지만은 않구나 싶어 감사한 마음이 든단다.

 

지현아, 얼마 전 방송에서 팔, 다리가 없는 장애를 가진 친구를 본 적이 있어. 여자들이 있던 방에서 살다가 남자들이 있는 방으로 옮겨야 하는 시기가 되어 이사하는데, 처음에 그곳에 있던 커다란 아이들이 이 친구를 못살게 굴었거든. 그 친구에게는 생명의 위협으로까지 느껴지는 장면이어서 엄마는 당연히 여자들이 있는 방으로 다시 옮겨질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랬는데 그곳에 계시는 엄마 선생님들이 그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방어기술도 가르쳐주고 다른 남자아이들이 이 친구에게 적응할 수 있는 기회도 주면서 잘 어우러지도록 하는 모습을 보고 큰 깨우침을 얻었단다.

 

엄마라면 절대 그렇게 못했을 거야. 네가 아플까 봐 먼저 나서서 치워주고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줬던 모든 일련의 행동들이 어느 순간엔 손을 놨어야 했었다는 뒤늦은 자책으로 엄습해왔었지. 너를 보면 느끼게 되는 행복, 웃음, 따스함 들로 인해 마법에 걸린 것처럼 네 손을 놓지 못하고 엄마도 모르는 사이 더 잘할 수 있는 너를 가로막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후회가 돼.

 

집에서의 행동과 밖에서의 행동이 너무 다른 우리 지현이.

그럼에도 엄마는 믿고 있어.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직도 학교에서는 웅크린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세상을 밝게 받아들이고, 가슴 안에 사랑이 가득하고 여유롭고 당당한 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그날이 곧 오리라고.

 

지현아, 엄마는 부모가 된다는 것이 성숙한 인격체를 가진 인간으로 완성되어가는 마지막 담금질이 아닐까 생각해. 그 무엇으로도 단련될 수 없는 무쇠 같은 자아를 자식이라는 용광로를 통해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매끄럽고 단단하게 제련하는 것과 같은 과정. 너를 보면서 엄마는 사람의 거죽만 바라보는 낡은 눈을 버렸고, 장애를 넘어 모든 인간은 존재 자체로 귀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단다.

 

우리 지현이, 맘에 꼭 드는 환경이 아닌 곳에서도 조금만 더 용기를 가지고 네가 가진 마음의 힘을 표현하고 함께 손을 잡고 가는 학교생활이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먼저 너를 믿고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볼게. 혼자 일어서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을 언제까지나 응원하고 기도하겠다고 약속할게.

 

 

※ 지현이 학교문집에 싣는다고 부탁하셔서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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