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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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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깊다 / 도경회 노을 깊다 도경회 학교에서 친구한테 맞아 오늘도 눈언저리 붉습니다 아가, 니 얼굴이… 채 말이 끝나기도 전 잠투정하던 새끼제비 날개 죽지에 머리 파묻듯 어미 품에 머리 파묻습니다 푸른 탯줄 저려오는 내 영혼 한 조각 떨어져 나가는 것 보았는가 벽오동 한숨 내쉬며 잔가지 몹시 떨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 괜찮다 괜찮다 배냇병신 팔삭둥이 훌쩍 자라 에미보다 한정 없이 넓은 등 쓸어봅니다 심장을 움켜잡힌 듯 온 몸에 열꽃 솟아 꾹꾹 한탄을 눌러 담는 수척한 두 눈에 이끌고 온 저녁 어스름 속뿌리 까지 뎁히던 붉은 노을 가득 차 떠날 줄 모릅니다 -시집 [외나무다리 저편]에서 날씨가 덥다. 무덥다. 더위를 잊고자 편안히 누워서 읽어내려가던 시 가슴을 뜨겁게 한다. 속뿌리까지 뎁히는 자식을 둔 인연으로 내 대모가 되..
그리움 / 도경회 노르망디 해안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또는 에트레타의 해안 절벽/외젠들라크루아/19세기경 그리움 도경회 그녀, 파도가 된 걸까 내 시린 등 때리던 흔들리는 물너울 절벽을 후려쳐, 후려쳐 무슨 꽃을 피우는지 하얗게 부서지는 꽃향기 아득한 수평선 바짝 끌어당겨 날개돋이 끝낸 완강한 그리움 천길 절벽을 넘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파도 눈 푸른 새떼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날아가는 슬픔의 힘!
언약 / 도경회 언약 도경회 저 강이였을까 푸른 달의 계곡 휘돌아 흐르는 - 내 눈감거든 소지 종이에 큰애 이름 적어 가슴에 넣어라 내 심장에 붙이거라 길 가다가 맑고 큰 강 만나면 훨훨 띄워 보내마 어머니의 저승길도 막아서는 뇌성마비 첫 외손자 초행길 가벼우시라고 지킬 수 없는 애달픈 언약 아이웃음 방긋 방긋 발에 밟고 햇볕 장글장글한 날 어머니는 떠나셨다 팔랑 팔랑 나부끼는 하얀 저고리 고름 복사꽃 짙은 향에 하얀 치맛자락 둥실 부풀어올랐다 옷고름 뒤에서 밤을 밝힌 나비 떼 동무 삼아 어머니 훨훨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 시집 외나무다리 저편 (푸른별 현대시선 24) 아침 미사를 보고 나오는데 대모님께서 손짓으로 불러세우신다. 수줍게 선물인데... 내 책이다... 하시며 주신다. 집에 와서 봉투를 열어보니 고운 시집이..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초등학교 6학년 늦여름 삼패리 강가에 놀러갔다가 모래채취로 수심이 갑작스레 깊어진 곳에 빠져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그 때 하염없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느낌 중에도 눈을 뜨고 앞을 봤었다. 뿌연 흙빛의 물 속. 어둡지 않고 환했다. 아. 이렇게 해서 죽는가보다. 신기하게도 맘이 어찌나 편하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간 아무 기억도 떠올리지 않았었다. 더 원하는 것도, 아쉬울 것..
철로 / 윤정숙 철로 - 윤정숙 다가서면 안돼 멀어져서도 안돼 우린 영원한 평행의 존재 우리의 균형이 깨어졌던 그날의 무서운 참상을 보았지 수많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던 그 지상의 아비규환을 하늘과 땅이 가진 평행처럼 그렇게 바늘과 실이 가진 평행처럼 그렇게 우리의 길은 하나 낮아서 초라하지 않고 멀어져 애달프지 않고 가까워져 무심치 않는 우주의 수수께끼 같은 그런 심연 우리의 머뭇거림이 다하고 다하여 백골마저 한 줌 재로 삭아질 때까지 길이 되어 길을 여는 것이야 아침 신문의 코너에서 이 글을 만난 순간 작가가 내 속에 들어왔다 갔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연전 내 속 생각과 닮았다. 나이를 먹었는가. 가까워져서 답답해지기보단 균형이 깨어지지 않는 평행의 존재에서 평안을 얻기도 한다. 바람길이 통하는 거리 지나는 ..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어제는 어제의 시간이 오늘은 오늘의 시간이 때론 흔들려도 행복한 하루
하(河) - 이호우 어떻게 살면 어떠며, 어떻게 죽으면 어떠랴 나고 살고 죽음이 또한 무엇인들 무엇하랴 대하(大河)는 소리를 거두고 흐를 대로 흐르네 얼마 전 이 시를 읽고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세상만사가 무엇을 말하던 물은 그저 흐를 대로 흘러간다는. 강물에 휩쓸려가느라 내 모습을 바로보지 못하는 삶은 살지 않겠다던 20대의 풋풋함도 기억났다. 한강을 지척에 두고 살아서인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으며 빠르게 흡입했던 기억도 난다. 누군가는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본다고 했고 누군가는 모든것은 지나간다고 했던가 오늘은 한강의 흐름을 보고싶다. 비가 많이 온 날 팔당에서 방류된 물살은 무섭도록 도도했었는데.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의 풀 - 류시화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 주기 때문이다.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가를 보아라. 학교에서 돌아오는 지현이를 데리고 진주성에 갔다. 가기로 했던 것이니 갔다고 해야 옳겠다. 바람 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햇살이 저만큼 좋은데. 걷다보니 아무것도 아닌것이 아니어서 목도리에 모자를 눌러써도 양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