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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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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마음 아이를 낳고 부모로 산다는 것은 인생의 또 다른 문을 여는 과정이다. 특히 장애 아이를 낳는 순간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따라오는 주변의 무지한 언어들의 타격감에 휘청거리고 부모이기 전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송두리째 의심받게 되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삶에 대한 자부심이 이토록이나 힘이 없을 수도 있나 아연해지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이 두 아이를 끌어안고 살아나가야만 하는 어미로서의 힘이 발현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다운증후군 아이들의 특성인 사회성이 좋다는 그 단어가 우리 지현이에게는 전혀 성립이 되지 않아 밖에 나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어야만 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치열하고 완강한 거부로 시작되는 것이어서 항상 아이의 감정에 이입된 엄마를 슬프게 했는데 그 ..
냄새 2교시가 지난 후 복도를 가득 채운 조림 냄새. 한쪽으로 고개가 들려지며 맡게 되는 맛난 냄새. 고프지도 않은 배를 출렁이게 한다. 점심시간, 냄새를 기억하기만 해도 침이 가득 고여오는 기대감에 식판을 들고 섰는데 맡았던 냄새와 매치되는 음식이 하나도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
네거리에서 / 김사인 네거리에서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손 뻗쳐도 뻗쳐도 와닿는 것은 허전한 바람, 한 줌 바람 그래도 팔 벌리고 애 끓어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살 닳는 안타까움인지도 몰라 몰라 아무것도 아닌지도 돌아가 어둠 속 혼자 더듬어 마시는 찬물 한 모금인지도 몰라 깨지 못하는, 그러나 깰 수밖에 없는 한 자리 허망한 꿈인지도 몰라 무심히 떨어지는 갈잎 하나인지도 몰라 그러나 또 무엇일까 고개 돌려도 솟구쳐오르는 울음 같은 이것 끝내 몸부림으로 나를 달려가게 하는 이것 약속도 무엇도 아닌 허망한 기약에 기대어 칼바람 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 무엇일까 김사인 시집 , 창비 탯줄로 이어진 인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감당할 아픔의 무게가 있겠지. 그런데 나와 같은 사람들은 자식이 느끼는 아픔의 무게를 함께 감당할 자..
끄적끄적 지현이가 개학을 했다. 여름방학은 몸이 아파서 힘들었고 겨울방학은 마음이 아파서 힘들었다. 개학은 거짓말처럼 일순 모든 상황을 정리시켰다. 설 연휴까지도 개학날 맞춰 일어날 수 있을까, 학교와 방과후 활동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 넣어본다고 용을 썼는데 보란 듯이 지현이는 엄마와 함께 한 전날의 약속을 잊지 않고 아침에 단번에 일어나 밥 먹고 학교에 가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방학식 날 시작된 모든 일들이 무엇이었지? 당황스러우면서도 그 커다란 울음이 치유될 만큼 시간이 지나고도 남았던 걸까? 원인제공의 환경에 다시 보내지는 걸 그토록 두려워했었는데... 헛웃음이 날 지경으로 상황정리가 안되었다. 열린학교에 보내면서 지현이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았던지라 요 근래 방학 ..
아버지 꿈 속에서 아버지를 뵈었다. 내가 실제적으로는 몰랐을 젊은 아버지의 빛나는 미소였다. 마주 서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나 좋았다. 꿈이었음을 깨닫던 그 찰나적 순간 아버지 나는 괜찮아요. 민경이는 아버지가 보셨으면 너무도 좋아하셨을 만큼 잘 자랐어요. 지현이가 그 똥그란 눈으로 얼마나 예쁘게 웃으며 생활하는지 보신다면 저 모르게 아파하셨던 마음들이 다 상쇄되고도 남으셨을 텐데... 숨가쁘게 안타까웠다. 말하지 못했던 말들이 부디 아버지께 가서 닿기를...
빌리 엘리어트 네가 웃고, 울고, 화내는 모습을 옆에서 봐주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는 항상 너와 함께 있을거야. 그리고 끝까지 너답게 살라고 한 마지막 말까지.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18세가 되면 보라고 했던 편지를 벌써 읽어봤다며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오라던 선생님 앞에 내놓던 편지. 선생님이 읽으실 때 이미 외어버린 내용을 읊조리는 빌리를 보면서 엄마로서 내 자식들에게 저렇게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편지가 정확한 대사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말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또한 무뚝뚝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아빠를 보면서 끝까지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엄마의 편지를 읽고난 후여서 그랬을 것이다. 엄마가 사랑했던 남자로서의 아빠의 모습이 언젠간 보여질 거라는 믿음이었다. 영국 ..
민경이의 축하 어제는 생일이라고 엄마 생각이 나서 왠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민경이가 빠지니 뭐든 재미가 없어서 저녁먹는 것도 시들했는데 늦은 밤 집에 와서 엄마를 보자마자 엄마를 꼬옥 안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마치 부르스를 추는 것처럼 빙빙 돌면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받고 너무도 행복해졌다.
새학기 그림 / 박 병 국 지현이 학교에 다녀왔다. 이제는 한번쯤 같은 반을 경험해 본 아이들 그래도 아직 경직되어 있는 지현이. 여학생 세 명 남학생 여섯 명 반이 가득찬 느낌이다. 지현이는 그 곳에서 또 꽃처럼 앉아서 외로워보인다. 보조선생님께서 중학교에 입학하던 당시의 지현이를 떠올리시며 그 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