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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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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인 / 르 클레지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남기신 사진을 통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사진으로 남겨진 그 시절이 자신의 가슴에 영원히 박힌 프리즘처럼 삶을 모으고 발산하는 중심이 되는 힘. 그 힘이 아버지의 삶인 것 같다.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그 삶을 반추하고 위로할 수 있는 자세가 되기 어려운데 그만큼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자리는 우리 또한 어느 지점을 통과해야만 볼 수 있는 곳에 작은 창문으로 되어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흑백사진처럼 흑백언어도 있다면 이 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좋았다. [마씨 부자] 라오서 지음 / 고점복 옮김 / 창비 체면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하게 생각하며 관료를 지향하는 아버지 마쩌런. 그러면서도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책임 의식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아..
댈러웨이 부인 / 버지니아 울프 뭐랄까 책을 읽으면서 자꾸 드는 생각이 감독의 컷 싸인 없이 한 번에 쭈욱 부감하며 인간들을 잡은 느낌. 인물 간 이어짐이 자연스러웠고 너무도 아픔을 느끼고 있는 셉티머스 부인의 독백 이후 그 앞을 지나던 피터 월시가 그들을 보고 젊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사람은 아픔과 절망에 휩싸여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괴로운 것 같다고 여기지만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는 나의 어떤 부분을 다른 사람은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초반부에 셰익스피어의 글에서 인용한 부분. 댈러웨이 부인이 좌우명처럼 가슴에 여러 번 떠올리는 구절. 더 이상 두려워 마라. 태양의 뜨거움을,또한 광폭한 겨울의 사나움을.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의 젊었을 적 친구 피터 월시의 말로 표현된 부분 늙는다는 것이 ..
아이의 스트레스 / 오은영 자녀 교육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느끼는 일관성 조차도 부모가 정한 규칙이나 원칙 위에 아이를 잘 자라도록 돕는 대원칙이 있음을 전제하며 '아이를 잘 자라도록 돕는 것'이라는 목표 아래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하는 점이나 가정 내에 너무 많은 규칙이나 약속을 만드는 것도 자칫 스트레스를 늘릴 수 있으므로 좋지 않다거나 부모는 원칙 이전에 상황에 맞게 좀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때그때마다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서 다뤄주는 것으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최선을 다해 다루면 된다고 하는 점 등이 마음에 담긴다. 작은 목차로 나누어 사례에 맞게 적절한 대응을 기술하는 방식의 내용이 실제적으로 아이를 키우..
자라지 않는 아이 / 펄 벅 "우리 아이의 정신도 최대로 성장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아주 조금밖에 자라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그 권리는 나나 다른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것이다. 아이에게 아이가 알 수 있는 것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건 잘못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슬픈 여정을 거쳐서 나는 인간의 정신에 대한 경외심과 존중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인간성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며 누구나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가르쳐 준 것이 바로 내 아이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받아서는 안 되며 누구나 세상에서 자기 자리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이런 사실을 깨달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참지 못하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
사랑하지 말자 / 도올 빨리 읽고 신랑이 읽은 다음엔 추석에 내려온 민경이에게 들려 보내야겠다 마음먹었으나 후반의 '천지'편에서 발목이 잡혀 계획이 어그러진 사정을 얘기했더니 웃으면서 학교에서 빌려볼 테니 그냥 편하게 보세요 한다. 끝내 '천지'편을 건너뛰니 읽는데 다시 즐거움이 찾아왔다. 어려운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다. 지난 학기 민경이는 시간표를 잘 짠 거 같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자신이 원하던 과목을 다 신청할 수 있었던 행운을 믿을 수 없어했다. 그만큼 교수님들의 강의가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좋아했었는데 시험을 보려니 강의가 목요일에 원래 3과목인 데다가 화요일 시험이 목요일로 밀리면서 4과목을 하루에 다 보게 되었고 동기들의 동정을 한 몸에 받았던 날, 심장을 데우던 강의의 여운이 시험지 ..
백범일지 / 김구 필치는 꾸밈이 없고 강직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진솔함이 있어 여운이 길다. 집안 내력부터 아버지의 성품 묘사라든지 유달리 개구지던 어린 시절은 소설처럼 흥미롭다. 관상학을 공부하다가 자신의 상을 보고 한군데도 상서로운 구석이 없어서 절망하다가도 상보다 몸, 몸 좋은 것보다 마음 좋은 것이 더 좋다는 글귀에 자신은 앞으로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마음먹었다는 부분이 강하게 남았는데 선생의 삶의 방향이 편견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종교조차 배움의 한 통로로 인식한 듯한 포용력은 이 때의 다짐에 기반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언제 위험에 처할지 모르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주는 유언처럼 적으셨다는 내용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연대기인 것만 같아서 그 파란만장함이 더 시리게 느..
黑山 / 김훈 마노리는 길 걷기가 단잠처럼 편안했다. 마노리에게 걸음걸이는 힘을 쓰는 일이 아니었다. 마노리는 숨을 쉬듯이 걸었다. 말 탄 사람이 지치고 말이 주저앉는 저녁 무렵에도 고삐를 쥐고 걷는 마노리는 힘이 남아 있었다. 길고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면 사람의 마을이 나타났고 다시 바람 센 고원을 건너가면 언덕을 등지고 사람의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길이 있어서, 그 길을 사람이 걸어서 오간다는 것이 마노리는 신기하고 또 편안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갈 뿐 아니라, 저 마을에서 이 마을로도 가면서, 길 위에서 서로 마주치기도 하고 마주친 사람들이 어긋나게 제 길을 가고 나면 길은 비어 있어서 누구나 또 지나갈 수 있었다. 길에는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이 있었고 주인은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 주노 디아스 오스카 와오는 거대한 체구에 SF 소설에 열광하고 항상 사랑에 목말라하지만 실패하고 친구들에게 왕따 당하는 미국의 도미니카계 이민자의 아들이다. 아름다운 누나 롤라, 생활력 강한 엄마의 이야기가 오스카의 이야기보다 더 흥미롭다. 도미니카에서 31년 동안 독재자의 통치 아래에서 어머니 벨리와 그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이 어떻게 희생되었으며 그녀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읽노라면 간밤의 거대한 폭풍을 견뎌낸 쪽배의 그것처럼 신산스럽다. 한편으론 인간이 가진 저력을 느끼게도 된다. 삶을 통째로 견뎌낸 가문의 일원이 아니랄까 봐 미련하다 느껴질 만큼 자신이 믿는 감정에 사력을 다하여 다가가는 오스카 와오. 어머니 벨리가 사랑하던 그 방식과 닮아있다. 사탕수수가 섞어 만들어진 검은색 늪지 같은 도미니카 시..